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1883~1978)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5세이었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손녀딸이다.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 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을 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이청씨가 운현궁의 소유(관리)로 된 것은 1948년부터이다.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